사극이나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화려한 수라상이나 양반들의 문어발 같은 교자상 말고, 그 시절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진짜 평민들은 도대체 매일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흔히 조선시대 평민의 삶이라고 하면 굶주림과 가난 속에서 피폐한 식사를 했을 거라 짐작하기 쉽지만, 역사 자료를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흥미롭고 외외의 면모들이 가득합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넘어, 조선 시대 평민들의 하루 식사 풍경을 기록을 바탕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았습니다.

하루에 두 번 먹다가 바빠지면 세 번으로 늘어났던 유연한 식사 시간
조선시대 평민들의 하루 식사 횟수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하루 세 삼시 세끼’의 규칙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조선 전반에 걸쳐 평민들의 일상적인 식사는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이 기본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는 보통 해가 뜨고 한참 뒤인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먹었고, 저녁 식사는 해가 지기 전인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에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주기가 1년 내내 유지되지는 않았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며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 식사 횟수가 ‘노동의 강도’와 ‘낮의 길이’에 따라 매우 유연하게 변했다는 점입니다.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하루 세 번 식사를 했습니다. 이때 중간에 추가되는 식사를 ‘낮밥’ 혹은 ‘점심(點心)’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오늘날의 정식 식사라기보다는 혹독한 육체노동을 버티기 위한 일종의 에너지 보충용 새참에 가까웠습니다. 반대로 해가 짧아지고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에는 다시 하루 두 번으로 식사를 줄였습니다. 심지어 흉년이 들거나 식량이 부족할 때는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식사 주기가 철저히 자연의 흐름과 육체 노동의 주기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 활동하고, 몸을 많이 쓰는 계절에는 더 많이 먹는 지극히 직관적이고 생존에 직결된 방식이었던 셈입니다. 현대인들이 시계 바늘에 맞춰 억지로 배가 고프지 않아도 점심을 먹는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의 식사 패턴이 오히려 인간의 생체 리듬에는 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밥그릇 크기와 대식 문화의 이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인들의 엄청난 식사량’입니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했던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Daveluy) 주교의 기록을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은 보통 노동자가 한 끼에 1리터가 넘는 밥을 먹으며, 엄청난 대식가들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실제로 발굴되는 조선시대 평민용 밥그릇(주발)을 보면 현대의 공깃밥 그릇보다 최소 3~4배, 많게는 5배 이상 큽니다. 당시 성인 남성의 한 끼 쌀 소비량은 약 5홉(약 400g 이상)으로, 지금 우리가 한 끼에 먹는 쌀의 양이 70~80g 수준임을 감안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양입니다.
처음 이 자료들을 접했을 때는 그저 “옛날 사람들은 대단한 대식가였구나” 하고 가볍게 웃어넘겼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자료를 들여다보니, 그 거대한 밥그릇 이면에는 꽤나 씁쓸한 생존의 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평민들이 그토록 많은 양의 밥을 먹어야 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반찬이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평민들의 상차림은 밥 한 그릇에 국 한 사발, 그리고 김치나 장아찌 한두 가지가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육류나 생선 같은 고단백, 고지방 반찬을 섭취할 기회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하루에 필요한 칼로리를 오직 탄수화물인 ‘밥’으로만 채워야 했던 것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거친 농사일을 소화하려면 그 정도의 탄수화물 폭탄이 아니면 몸이 버텨내질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조선 평민들의 대식 문화는 풍요로움의 상징이 아니라, 영양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한 눈물겨운 생존 방식이었다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얀 쌀밥 대신 주를 이뤘던 잡곡밥과 소박한 시래기 한 그릇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밥)은 평민들의 일상 식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쌀은 세금(조세)으로 바쳐야 하는 귀한 재화였고,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고 나면 평민들의 몫으로 남는 쌀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평민들의 밥그릇을 채운 것은 대부분 보리, 조, 수수, 기장, 피 같은 거친 잡곡들이었습니다. 쌀은 겨우 밥물에 찰기를 주기 위해 아주 조금 섞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잡곡밥과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녔던 것이 바로 ‘국’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평민 식생활의 핵심은 ‘밥을 국에 말아 먹는 문화’였습니다. 왜 국이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거친 잡곡밥은 그냥 삼키기에는 너무 뻑뻑하고 소화가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찌개나 국에 밥을 말아 부드럽게 넘겨야 많은 양의 밥을 빠른 시간 내에 소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가장 흔하게 먹었던 국은 무청을 말린 시래기로 끓인 시래깃국이나 된장을 풀고 주변에서 채취한 풋나물을 넣은 된장국이었습니다. 가끔 운이 좋으면 냇가에서 잡은 작은 물고기나 민물조개를 넣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소금과 된장으로 간을 맞춘 소박한 채소국이었습니다. 반찬 역시 소금에 절인 무짠지, 배추김치(당시에는 고춧가루가 없거나 귀했으므로 맑은 동치미나 소금절임 형태)가 전부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현대 기준으로 보면 이 식단이 완벽한 ‘웰빙식’이자 ‘다이어트 식단’이라는 점입니다. 식이섬유가 풍부한 잡곡과 발효식품인 된장, 그리고 각종 산나물로 이루어진 식단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평민들에게는 이것이 건강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선택지가 없는 외길이었습니다. 지방과 단백질이 극도로 결핍된 식단이었기에, 그들은 늘 기름진 음식에 대한 갈망을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풍요로운 수확기 뒤에 찾아오는 가혹한 보릿고개와 구황 음식들
조선시대 평민들의 식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계절에 따른 식량의 변동성, 즉 ‘보릿고개’입니다. 가을에 추수한 쌀과 잡곡이 바닥나고 봄에 심은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은 2월에서 4월 사이, 평민들의 식탁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정상적인 식사를 고수할 수 있는 평민 가정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이를 대비해 《구황촬요(救荒撮要)》 같은 책을 펴내 백성들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로 허기를 채우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평민들은 소나무의 부드러운 속껍질을 벗겨내어 말린 뒤 가루를 내어 떡을 해 먹거나(송기떡), 칡뿌리를 캐어 즙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로 죽을 끓여 먹었습니다. 느릅나무 껍질이나 달래, 씀바귀 같은 야생 산나물은 훌륭한 식량 대용품이 되었습니다.
자료를 읽으며 참 마음이 무거웠던 부분은, 우리가 흔히 봄철의 낭만으로 생각하는 ‘봄나물 캐기’가 당시 평민들에게는 낭만이 아니라 가혹한 생존 투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쓴맛이 강한 산나물을 독기를 빼내기 위해 몇 번씩 물에 우려내고, 그것을 겨우 몇 줌 남은 잡곡 가루와 섞어 양을 불려 죽을 끓여 먹었던 흔적들이 기록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식탁의 풍요와 빈곤이 극단적으로 오갔던 것이 바로 조선 평민들의 진짜 삶이었습니다.
고된 노동을 달래주던 탁주 한 잔과 단백질 보충의 기회들
그렇다면 평민들은 평생 고기와 술을 구경도 못 하고 살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이들에게도 합법적이거나 혹은 비공식적으로 단백질과 알코올을 섭취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을의 큰 잔치나 제사, 그리고 ‘두레’나 ‘품앗이’ 같은 공동 노동의 날이었습니다. 모내기나 추수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을 했는데, 이때 일꾼들을 대접하기 위해 술과 고기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술은 곡식을 발효시켜 거칠게 걸러낸 ‘탁주(막걸리)’였습니다. 이 탁주는 단순한 유흥을 위한 술이 아니었습니다. 알코올 도수가 낮고 곡물의 영양분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마시면 금방 포만감이 들고 힘이 나는 일종의 ‘액체 탄수화물’이자 에너지 음료 역할을 했습니다.
고기의 경우, 조선 시대에는 농사에 필수적인 소를 잡는 것이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우금령(牛禁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실제로는 잔치나 상례가 있을 때 밀도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소고기 외에도 평민들은 개고기나 돼지고기, 혹은 꿩이나 토끼 같은 야생 동물을 사냥해 단백질을 보충했습니다. 특히 여름철 삼복더위에는 지친 몸을 보하기 위해 개장국(보신탕의 전신)을 끓여 먹는 것이 평민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평민들에게 고기 한 점과 술 한 잔은 일상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해방구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겨운 노동 끝에 이웃들과 둘러앉아 마시는 텁텁한 탁주 한 잔의 위로가 있었기에, 그 가혹한 시대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 속 평민들의 식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조선시대 평민들의 하루 식사를 추적해보면서 느낀 점은, 그들의 식탁이 단순히 무엇을 먹었느냐의 문제를 넘어 당시의 사회 체제, 기후, 노동 환경, 그리고 생존을 위한 인간의 지혜가 집약된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식사는 화려하지 않았고,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빈약했습니다. 영양 불균형을 메우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밥그릇과, 겨울과 봄을 버텨내기 위한 구황 음식들의 기록은 오늘날 풍요 속에서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동시에,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철에 따라 식사 횟수를 조절하고, 이웃과 함께 품을 나누며 마시던 탁주 한 잔의 여유는 물질적 풍요가 곧 삶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오래된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켜 줍니다.
역사는 왕과 영웅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역사를 밑바닥에서 지탱했던 것은 매일 거친 잡곡밥과 시래깃국 한 사발을 비워내며 묵묵히 땅을 일구었던 평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소박하고도 치열했던 식사 풍경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조선의 역사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이익, 《성호사설(星湖僿說)》
- 샤를 달레(Charles Dallet),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식생활 풍속지》
- 농촌진흥청, 《조선시대 구황식물과 구황촬요 연구》
답글 남기기